빅데이터 시대의 도래는 단지 기술적 진보가 아닌 훨씬 더 큰 함의를 갖는다. 방대한 데이터에서 의미를 읽어내는 수학적 방식의 진보는 엉뚱하게도 사회적 변혁을 이끌어내는 중이다. 영웅이 이끄는 시대에서 참여 민주주의 시대로의 변화다. 사회 구성원들의 다수 견해가 변화를 이끌면서, 대중은 계도의 대상이 아니라 시대를 이끄는 주체가 되었다. 계몽주의의 그림자가 드디어 걷히는 중이다.


오늘자 동아일보에 박형주 국가수리과학연구소장(아주대 석좌교수)이 쓴 '빅데이터의 시대정신'이라는 칼럼에서 가져온 문단입니다. 박 소장은 이 글에서 스페인 의류회사 '자라'(그나저나 'zara'는 스페인어니까 /사라/에 더 가까운 발음일 텐데 말입니다.)가 빅데이터를 활용해 성공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예전의 패션산업은 엘리트 디자이너의 통찰과 영감으로 주도됐다. 한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유명 디자이너가 유행할 옷의 디자인을 제시하면 그걸 대량생산해서 많이 파는 것이다.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은데, 오르테가(kini註 - 자라 창립자 아만시오 오르테가)는 이걸 뒤집어엎었다. 보통 사람들의 기호와 바람을 파악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준다는 시각으로 바꿨다. 전지전능한 지도자의 방향 제시 대신 소비자들이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니, 패션 민주주의쯤 된다.


저는 이 글을 읽고 프로야구 한화 김성근 감독(74·사진)이 떠올랐습니다. 김 감독 역시 '엘리트 야구인의 통찰과 영감'으로 야구계를 주도했습니다. 그 통찰과 영감을 좋아했든 그렇지 않았 그게 SK 왕조를 이루는 밑바탕을 이뤘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다른 야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밑바탕에 빅데이터가 있다는 사실은 두말하면 잔소리. 메이저리그에서 '초짜 감독' 선임 붐이 일어난 이유도 여기 숨어 있습니다. 빅데이터 때문에 감독 영향력이 그만큼 줄어든 겁니다.


예전에 '베이스볼 비키니'를 통해 소개한 것처럼 김 감독 야구 스타일은 저득점 환경, 그러니까 투고타저 시절에 빛을 발합니다. 애석하게도 김 감독이 한화 지휘봉을 잡은 지난해와 올해는 정반대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김 감독 본인 말처럼 "투수가 없는" 탓인지 몰라도 한화는 상대를 더욱 고득점 환경으로 내모는 팀입니다. 올해 현재(5.82)나 지난해(5.11) 모두 한화보다 팀 평균자책점이 떨어지는 팀은 최하위 kt밖에 없습니다.



득·실점이 많다는 건 한 점이 경기에서 갖는 희소성도 줄어든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경기 숫자가 늘어난 것 역시 한 경기 승패가 시즌 성적에서 차지하는 중요성도 떨어진다는 뜻이죠. 이렇게 되면 감독의 통찰과 영감이 경기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는 '야구 민주주의'로 이어지게 됩니다. 야구를 감독이 하는 종목에서 선수가 하는 종목으로 바꾸어 놓는 거니까요. 빅데이터와 타고투저 모두 감독 영향력을 점점 줄이는 구실을 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김 감독이 한화에서 아주 실패만 한 건 아닙니다. 저는 지난 시즌이 개막하기 전에 김 감독이 새로 맡은 팀에 평균 9.4승을 더하기 때문에 한화가 승률 0.460 정도를 기록할 수 있을 걸로 예상했습니다. 실제 결과는 0.472(68승 76패)로 이보다 높았습니다. 김 감독이 자기 평균 능력 이상을 발휘한 셈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자유계약선수(FA) 시장에서 큰손 노릇을 한 영향도 있을 겁니다.


그럼 지난해 연착륙했으니 올해는 접근을 좀 달리하는 게 맞았다고 봅니다. 김 감독은 대신 지난해를 '실패'라고 규정하고 '더 열심히, 더 열심히'를 강조했죠. 그 탓에 '노오력보다 덕력'이라는 시대정신을 거스르고 말았고, 이런 자기 확신이 결국 일부 팬들이 사퇴를 종용하는 비극으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미시적인 데이터에는 누구보다 전문가일지 모르지만 거시적 관점에서 빅데이터를 놓친 결과입니다.


현재 들리는 소문으로는 김 감독이 계약 기간이 끝나는 내년까지 팀을 맡을 확률이 높아 보입니다. 과연 김 감독이 빅데이터 시대에 어울리게 변할 수 있을까요? 이 글 맨 처음에 소개한 글에서 박 원장은 미래 일자리가 요구하는 인재를 이런 방식으로 소개합니다.


패션 회사에 입사한 신입 직원이 다음 시즌을 위한 디자인을 맡았다고 하자. 자신의 취향에 따른 창의적인 디자인을 제출하는 게 통상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오르테가의 관점에서 이 직원은 자신의 안목을 앞세우는 영웅일 수는 있어도 회사가 바라는 인재는 아니다. 잠재 고객들이 무슨 영화를 보고 무슨 음식을 먹는지 등의 라이프스타일을 유추할 수 있는 각종 자료를 모으는 데에서 시작하는 건 어떨까. 이로부터 합리적 추론의 과정을 거쳐 패션에 관한 의미를 이끌어내서 수요자들이 원하는 디자인을 탄생시키는 사람이라면 패션 민주주의의 기수라고 할 만하다.


내년에도 김 감독이 '야구 민주주의의 기수'가 될 확률은 제로(0)에 수렴할 겁니다. 그래도 야구 민주주의 폴로어(follower)는 되어야 명예회복에 성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제 야구는 영웅 감독을 필요로 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영웅 선수가 필요 없던 때는 없었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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