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1989년 프로야구 태평양은 3위로 시즌을 마쳤습니다. 26일 방송한 TvN '응답하라 1988' 16화에서 보라 아버지(성동일 분) 혼자 내기에서 진 겁니다. 이 드라마에서 보라 아버지하고 정봉이 아버지(김성균 분), 택이 아버지(최무성 분)는 정봉이 아버지가 허리를 다쳐 누워 있는 병실에서 태평양이 4강에 가냐 못 가냐를 두고 내기를 벌입니다. 당시 태평양은 정규 시즌에서 62승 4무 54패(승률 .534)로 전신 삼미나 청보를 포함해도 창단 첫 '가을야구'에 진출했습니다. 


물론 제도가 바뀐 것도 한몫했습니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1989년부터 지금처럼 '계단식'으로 포스트시즌을 치렀습니다. 태평양은 준플레이오프에서는 4위 삼성을 2승 1패로 꺾었지만 플레이오프에서 해태에 3전 전패로 탈락하며 시즌을 마감했습니다. 에이스 박정현(46)이 부상으로 플레이오프에 나서지 못한 게 컸습니다.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13이닝 동안 던지고 3차전 때 다시 5와 3분의 2이닝을 책임졌으니 탈이 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죠.


1989년은 김성근 현 한화 감독(73)이 태평양 지휘봉을 잡은 첫 시즌이기도 합니다. 김 감독은 태평양을 맡자 마자 그 유명한 '오대산 극기 훈련'을 실시하며 선수단 정신력 강화에 나섰습니다. 당시에도 눈 쌓인 산길을 달리고 얼음물에 들어가는 게 야구를 잘하는 것하고 무슨 관계가 있냐는 불만이 선수단 사이에서 나왔습니다.  게다가 당시 태평양은 선수들에게 1인당 5만 원씩 참가비를 내라고 주문했고 밥도 스스로 지어 먹어야 했습니다. 재일교포 투수 김신부(52)는 "연봉 1억 원을 줘도 싫다. 당장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김 감독은 이 지옥 훈련을 따라가지 않고 숙소에 남아 시즌을 구상했습니다. 그러면서 짜낸 묘안이 안방 숭의(도원)구장 담장 높이를 4.7m에서 7.5m로 올리는 것. 1988년 인천 도원구장에서 나온 홈런은 70개. 이 중 39개(55.7%)를 상대 팀이 때렸습니다. 담장을 올리고 나서는 39개 중에서 20개(51.3%)만 상대 팀이 때렸습니다. 게다가 홈런 개수 자체가 줄었기 때문에 김 감독으로서는 '계산이 서는' 야구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박정현과 함께 최창호(49·현 SK 코치)와 정명원(49·현 kt 코치·사진 오른쪽부터)이 '20대 투수 트로이카'로 떠올랐습니다. 박정현이 19승, 정명원이 11승, 최창호가 10승을 거두면서 전체 62승 중 40승(64.5%)을 책임졌습니다. 평균자책점에서도 박정현(2.15)이 2위, 최창호(2.22)가 3위, 정명원(2.45)이 3위를 차지했습니다. 이들보다 위에는 1.17을 기록한 선동열 전 KIA 감독(52) 한 명밖에 없습니다. 결국 박정현은 이해 신인왕을 차지했습니다.


타격은 늘 그랬듯 1989년에도 별 볼 일 없습니다. 그나마 눈에 띄었던 존재는 김동기(51). 프로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전 경기 출장 기록을 세운 김동기는 이해 OPS(출루율+장타력) .779로 9위를 차지했습니다. 안타는 정확히 100개(11홈런)을 때렸고 타점은 59개(공동 7위)를 기록했습니다. 당시 노장 취급을 받았던 주장 김일권(59)은 베이스를 62번 훔치며 도루왕을 차지했고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도 받았습니다.


많은 올드 팬들이 1989년을 프로야구 출범 뒤 처음으로 인천이 구도(球都) 명성을 되찾은 해로 기억하고는 합니다. 인천시민들 역시 태평양에 아낌없는 성원을 보냈습니다. 당시 도원구장을 찾은 팬은 약 41만9000여 명. 이는 1988년(16만8000여 명)보다 2.5배 늘어난 숫자입니다. 당시 정규리그 1위 팀 빙그레(29만9000여 명)하고 비교해도 40.1%가 많은 인원입니다.


이제 공식적으로 KBO 역사에서 사라진 구단이지만 '돌핀스 유민' 한 사람으로서 그 시절이 참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제 인생 처음으로 에이스에 대한 믿음을 가슴에 품게 만들었던 그 해. 정말 딱 하루만이라도 다시 "돌핀스 돌핀스 무적 함대 돌핀스"라는 응원가를 따라부르며 그들을 응원하고 싶습니다. 응답하라, 1989 태평양 돌핀스여.




댓글,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