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제 아무리 외국인 선수라고 해도 어린 선수에게 너무 가혹합니다. 누군가 야반도주를 권유한대도 이해할 만한 지경입니다. 프로배구 여자부 인삼공사 외국인 선수 헤일리 스펠만(24·사진) 이야기입니다. 이럴 거면 외국인 선수 선발 제도를 뭐하러 바꿨나 싶을 정도입니다.


헤일리는 2015~2016 NH농협 V리그 전반기 15경기에서 467점을 올려 득점 1위에 올랐습니다. 경기당 평균 31.1점. 예상하시는 것처럼 '몰방(沒放)' 결과입니다. 헤일리는 전반기에 인삼공사 전체 공격 시도 2292번 중 51.6%(1183번)를 책임졌습니다. 올 시즌 여자부 6개 팀 중 외국인 선수 공격 점유율이 50%를 넘는 건 인삼공사가 유일합니다.


한국배구연맹(KOVO)은 올 시즌을 앞두고 외국인 선수 선발 제도를 트라이아웃(공개 선수 평가)으로 바꾸었습니다. 올 5월 열린 트라이아웃에서 1순위 지명권을 가지고 있던 인삼공사는 미국 스탠퍼드대를 졸업하고 아제르바이잔, 이탈리아 리그에서 뛴 헤일리를 지명했습니다. 당시 인삼공사 이성희 감독은 "큰 키(198㎝)에 결정력까지 갖춘 것에 주목했는데 승부욕도 있으면서 팀을 먼저 생각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고 평했습니다. 전반기에 헤일리가 보여준 모습은 확실히 팀을 먼저 생각하는 것 이상입니다.


▌V리그 2015~2016 전반기 여자부 외국인 선수 공격 점유율

 순위  구단  이름  공격 시도  팀 공격 시도  공격 점유율  지난 시즌 외국인
 1  인삼공사  헤일리  1183  2292  51.6%  53.6%
 2  IBK기업은행  맥마혼  781  1782  43.8%  40.2%
 3  도로공사  시크라  857  2176  39.4%  48.3%
 4  흥국생명  테일러  871  2281  38.2%  46.9%
 5  현대건설  에밀리  724  2197  33.0%  49.0%
 6  GS칼텍스  켓벨  658  2371  27.8%  46.8%
 합계  5074  1만3099  38.7%  47.5%


지난 시즌 여자부 외국인 선수 공격 점유율은 47.5%였습니다. 올 시즌 전반기에는 38.7%로 내려왔습니다. 두 시즌 모두 인삼공사를 빼고 계산하면 지난 시즌은 46.3%, 올 시즌에는 36.0%입니다. 인삼공사가 외국인 선수 공격 점유율을 끌어 올리는 주범이었던 거죠. 그렇다고 성적이 나왔냐? 인삼공사는 지난 시즌에도 8승 22패(승점 26점)으로 최하위였고 올 시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2승 13패, 그것도 모두 세트 스코어 3-2 승리였습니다.


몰방도 전략이라고 이해하겠습니다. 세계 배구 이적 시장에서 선수들끼리 '한국에서 안 뛰어봤으면 점유율 이야기는 하지도 말라'고 한다죠. 그래도 예전에는 외국인 선수들 몸값이라도 많이 줬습니다. 수당을 별도로 받기는 하지만 헤일리는 15만 달러(약 1억7648만 원)가 공식 연봉입니다. 지난 시즌 외국인 선수 몸값 상한선(28만 달러·약 3억2942만 원)하고 비교해도 거의 절반 수준입니다. 실제로는 50만 달러(약 5억8825만 원) 이상을 쓰는 팀이 비일비재했고 말입니다. 


그래도 헤일리는 "조금 지친 건 사실이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한국 팬들은 정말 열정적으로 응원해 주신다. 가치를 매길 수 없을 만큼 좋은 경험을 했다"며 "후반기에는 모든 팀원들이 더 노력해서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팀을 먼저 생각하는 노력파"라는 평가를 받은 선수에게 참 어울리는 답변이었습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태어난 헤일리는 중학교 때까지는 테니스 선수였습니다. 더 어릴 때는 또래 소녀들처럼 발레도 했고요. 그러다 배구로 진로를 바꾼 건 어머니 자넷 씨 때문. 본인도 키가 185㎝인 자넷 씨는 딸이 8학년(중학교 2학년) 때 자기하고 키가 똑같아지면서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도 어릴 때 '키 큰 소녀 콤플렉스(tall girl syndrome)'에 시달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딸에게 큰 키가 유리한 배구를 권했습니다. 그 전에 본인이 직접 배구 코치들에게"185㎝ 짜리 8학년 딸이 있다. 배구를 시켜볼까 하는데 의견을 달라"고 e메일을 보냈습니다. '사커 맘'이 아니라 '발리 맘'이었던 셈이죠. 테니스광인 아버지는 처음에 반대하기도 했지만, 헤일리는 결국 두랑고 고교 2학년 때부터 테니스를 완전히 접고 배구에 전념하기 시작했습니다.


학교에서 친구들은 물론 선생님을 포함해도 키가 제일 컸던 헤일리는 배구를 시작하면서 키 큰 콤플렉스를 떨쳐 버릴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주변 사람들에게 '키 크고 싶으면 우유를 많이 마시라'고 조언할 정도가 됐습니다. 본인도 처음에는 테니스에서 배구로 종목을 바꾸길 꺼렸던 것도 사실 . 그래도 고교 시절 "배구를 너무 사랑한다. 내가 될 수 있는 최고 레벨 선수가 되고 싶다"고 말할 만큼 배구에 푹 빠졌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기쁜 순간도 배구 장학금을 받고 스탠퍼드대에 입학하게 됐을 때하고 고등학교 지역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을 때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테니스를 완전히 잊은 건 아닙니다. 헤일리는 "모든 종목을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앤드리 애거시(45)다. 아니, 가장 닮고 싶은 인물이 애거시"라며 "코트 위에서 근면 성실한 태도는 누구도 애거시를 따라갈 수 없다"고 평했습니다. 애거시 역시 헤일리처럼 라스베이거스 출신입니다. 헤일리는 "애거시는 '앤드리 애거시 재단'을 통해 자선 활동에도 열심이다. 그는 네바다주 남부의 많은 어린이들의 삶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밝은 정신 세계를 가진 선수라면 V리그 무대서 오래 보고 싶은 게 당연한 일. KOVO는 내년에도 트라이아웃으로 외국인 선수를 선발하되 현재 데리고 있는 선수하고 먼저 계약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방침입니다. 여기서 전제 조건은 선수도 동의해야 한다는 것. 만약 현재 소속팀하고 재계약을 거부하면 두 시즌 동안 V리그 무대를 밟을 수 없게 됩니다. 과연 헤일리가 계약이라고 쓰고 혹사라고 읽는 조건을 받아들일지 시즌이 절반이나 남았는데 벌써 걱정입니다.


그나저나 대전 스포츠 팬들은 무슨 죄가 있어서 여름에는 프로야구 한화에서 권혁(32)이 혹사 당하는 걸 보셔야 하고, 겨울에는 헤일리가 이 고생하는 걸 보셔야 한단 말입니까. 아, 프로배구 남자부 삼성화재도 연고지가 대전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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