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어쩐 일이십니까?" "그냥 얼굴 보러 왔어."


프로야구 한화 김성근 감독(73)은 12일 수원 방문 경기 때 1회초 공격이 끝나고 주심을 맡은 김성철 심판과 이렇게 싱거운 대화를 나눴습니다. 원래 김 감독은 주심에게 선발 라인업에 든 선수가 미처 도착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릴 예정이었죠. 하지만 김 감독이 "사실은…"이라며 운을 떼려 할 때 더그아웃에서 유니폼을 입고 있던 장운호(21·사진)가 보였습니다. 그러자 말을 바꿔 다시 자리로 돌아온 겁니다.


장운호가 '지각 출근'한 사연은 이랬습니다. 김 감독은 이날도 경희대 국제캠퍼스에서 특타 연습을 진행했습니다. 장운호도 특타조에 이름을 올렸죠. 문제(?)는 이날 장운호가 타격감이 너무 좋았다는 것. 김 감독은 원래 이 경기에 장운호를 내보내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특타를 보고 생각을 고쳐 먹었습니다. 먼저 연습장을 떠난 김 감독은 선발 라인업에 9번 타자 겸 중견수로 장운호를 적어 넣으라고 지시했습니다.


수원구장과 경희대 캠퍼스는 12㎞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길이 막히지 않는다면 차로 30분 안팎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 구단 버스도 시간을 맞춰 출발했지만 장운호는 경기 시작 시간까지 구장에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퇴근 시간하고 겹치면서 길이 막혔던 것. 한화는 길이 막힌다는 소식에 퀵서비스를 불러 장운호를 데려오기로 했지만 그마저 늦고 말았습니다.


김 감독은 "경기가 시작하는데 선발 명단에 있는 선수가 안 오니 죽겠더라. 1회초 공격이 빨리 끝나면 수비에 들어가야 하는데 어쩌나 싶었다. 게다가 1번 정근우(33)는 2구만에 아웃됐다"고 말했습니다. 게다가 믿었던 3번 타자 김경언(33)마저 1루수 땅볼로 죽으면서 2아웃. 한화로서는 2번 타자 강경학(23)이 2루를 밟고 있다는 게 그나마 위안거리였습니다.


그때부터 상황이 변했습니다. 4번 타자 김태균(33)이 2루타로 선취점을 뽑은데 이어 정현석(31)도 적시타를 날렸고, 최진행(30)도 2점 '사죄포'를 터뜨렸습니다. 7번 정범모(28)가 스트레이트 볼넷을 얻어내면서 김 감독은 한숨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대기 타석에 있던 권용관(39)을 불러 "무조건 치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9번 타순까지 돌아와도 장운호가 나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권용관은 베테랑답게 승부를 7구까지 끌고가면 시간을 벌었습니다. 그래도 결과는 아웃.


김 감독은 "다행히 공격시간은 길어졌는데 장운호 타순까지 돌아오게 생겼더라. 박노민(30)을 대타로 준비하고 있었는데 절묘하게 8번에서 공격이 끊겼다"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수비는 어쩔 수 없는 일. 주심에게 다가가 사실을 털어놓으려 할 때 마침 장운호가 도착한 겁니다. 


한국야구위원회(KBO) 규정에 따르면 선발 라인업을 교환한 뒤로는 경기를 시작할 때까지 이를 철회하거나 변경할 수 없습니다. 단 선수가 "미도착 등으로 불출전한 경우"는 교체가 가능합니다. 이번 케이스때도 장운호를 교체하는 게 한화에 유리했습니다. 만약 장운호가 끝내 도착하지 않았다면 한화로서는 교체 카드 한 장을 날릴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으니까요.


김 감독은 "퀵서비스로 야구장에 도착한 건 전 세계에서 장운호가 처음일 것"이라며 "그래도 장운호가 이날 경기에서 안타 2개를 쳐내며 제 몫을 다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날 애간장을 너무 녹이고 모든 걸 그라운드에서 쏟아부은 탓이었을까요. 장운호는 18일 타격 부진을 이유로 퓨처스리그(2군)로 내려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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