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어머니는 해가 중천에 뜨도록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는 아들이 원망스럽다.

제 아무리 이태백이 아무렇지도 않은 세상이라지만, 제대로 된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도 여태 월급쟁이 노릇도 변변찮게 해보지 못한 아들이 예뻐 보일 수만은 없는 것이다.

분명 어젯밤에도 새벽녘까지 쓰잘데기 없는 야구 나부랭이와 씨름하다가 해가 뜨고 나서야 겨우 잠들었을 게 틀림없다. 끄지도 않고 잠든 컴퓨터 모니터에는 알 수 없는 숫자와 그래프가 가득 들어 있었다.

"어이, 구보. 엄마가 취직 공부하랬지 만날 밤새 야구만 보랬냐?"

구보는 그 소리에 겨우 일어나 컴퓨터 앞에부터 앉는다. MLB.TV를 주소창에 치고 자리에 앉아 보스턴 경기를 클릭한다. 양키스에 박빙의 리드를 지키고 있었고, 파펠본이 마운드에 올라 있었다. 구보는 그제서야 안심한 듯 양치를 하고 때늦은 아침 식사를 한다.

하지만 다시 컴퓨터 앞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경기가 뒤집어진 후였다. 하릴없이 구보는 인터넷 창을 닫고 담배 한대를 피워 문다. 그리고는 별 수 없다는 듯, Keep the faith를 외치며 엑셀 파일을 연다.

파일 안에는 전날 경기까지 정리된 KBO의 모든 기록이 들어 있었다. 구보는 그 가운데 유니콘스 경기를 골라 플레이 하나 하나를 음미하며 WP를 알아낸다.

그렇게 30여분이나 흘렀을까? 드디어 그래프를 그릴 자료가 모두 완성됐다. 일러스트레이터에 숫자를 옮긴 다음 몇 번의 클릭으로 지난 경기를 그림 위에 옮기는 데 성공했다.

그랬다. 어제는 피로가 누적된 신철인을 너무 일찍 마운드에 올리는 바람에 분위기가 급격히 SK 쪽으로 흘렀다. 2 아웃을 잡아 놓고 마지막 아웃 카운트 하나를 지워내지 못했던 것이다. 구보는 신철인의 게임 로그를 차근히 살펴보면서, 피로 누적이 그의 성적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아본다.

그때 네이트온에서 누군가 말을 건다. QS가 6이닝 3실점이냐, 6이닝 3자책이냐를 물어 온다. 구보는 이 질문에 갑작스런 회의를 느낀다. 도대체 QS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게 자신의 삶에 어떤 도움이 될 것인가.

그건 말을 건 상대가 CPA에 붙어 버린 친구 녀석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오랜 여자친구를 고교 시절 구보가 짝사랑했기 때문도 아닐 것이다. 구보가 느낀 건 아마도 그에게 외출할 공간이 남아 있지 않다는 데에서 오는 폐소공포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적어도 친구에게는 매일 아침 외출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에 대한 공포심이었던 것이다. 그는 좁은 방에서 야구를 매개로 인터넷을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그에게 외출할 곳이라고는 야구장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야구장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건 없다. 고작해야 집과 10분 거리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뷰파인더를 통해 보이는 선수들의 단편적인 움직임이다.

구보는 1/1600초의 셔터 스피드로 연신 선수들의 자세를 촬영하고 있을 뿐이다. 머리가 빨리 넘어가든, 앞쪽 어깨가 벽을 만들어주지 못하든 사실 구보 자신의 생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다.
 
어쩌면 구보에게 가장 그리운 건 제대로 된 생활일는지도 모를 일이다. 언제부턴가 그의 생활 전체를 야구가 잠식해 버린 것만 같다.

오래 전, 이제는 CPA 남자 친구를 두게 된 여자 아이가 말했다.

"야구가 네 삶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 같아."

구보는 최근에야 그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당시 그에게는 다만 생활에서의 탈출구로 야구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군입대를 앞두고 있던 구보에게 불안을 씻는 유일한 분출구는 야구뿐이었다. 구보가 경기를 찾을 때마다 팀은 거의 매번 승리를 거두며 그의 불안감을 씻어줬다.

그 해 구보의 방문 승률에 기록된 유일한 패배는 그녀와 처음으로 관계를 가졌던 날뿐이었다. 그것도 정민태가 1회에 유지현에게 허용한 선두타자 홈런이 유일한 실점이었다. 그리고 구보가 친구의 여자와 관계를 맺은 것도 그 날이 유일했다.

어쩌다 둘이서 야구장에 가게 됐던 건지, 구보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마 구보는 그날의 사건에 대해 세세한 기록이 담긴 엑셀 파일을 필요로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녀와 관계를 맺는 동안 호르몬 분비의 변화를 그린 그래프까지는 필요치 않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다 문득, 여전히 자신은 저 진술을 이해할 수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도대체 애인의 친구와 잠자리를 갖는 후에 저 말이 왜 필요했을까.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면 굳이 이유를 떠올릴 필요도 없는 일이다. 저 말 역시 구보의 생활에 있어서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구보는 이리도 자신의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에만 에너지를 낭비하며 살아가는 걸까.

하지만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시계는 계속해서 깜빡였고, 구보는 시간을 때울 만한 일이 필요했다. 어쨌거나 살아 있다는 건 그런 것이니까 말이다. 결국 가벼운 손놀림으로 그는 즐겨찾기에 등록된 사이트를 하나씩 방문해 본다.

http://foulball.co.kr
http://bassbol.com
http://mlbbada.com
http://mlbtour.re.kr
http://mlbpark.com
http://mlbdream.com
http://mlbland.com
http://mlbkorea.us
http://dcinside.com

이제 삼국지에 비교해도 좋을 엠코 3국을 주시하는 일에서 사실 구보는 가장 큰 재미를 느낀다. 분명 인터넷 커뮤니티라는 곳에서도 정치적인 사안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더러 명성을 얻기도 하고, 또 그대로 사장돼 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구보의 생각은 늘 한결 같다. 그래서 뭘 어쩌겠단 말인가?

현실에서의 생활에 충실하라는 준엄한 경고를 남기고 사라졌던 세미찬호의 재등장에 구보는 어쩔 수 없이 쓴 웃음을 짓는다. 하지만 권력욕이란 결국 그런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확실히 인터넷 커뮤니티란 썩 괜찮은 도피처인 것이다.

말하자면, '온라인 자아‘는 확실히 나르시스트들에게 있어 최고의 선물이라는 얘기다. 어쩌면 그건 어느새 본명 대신 닉네임으로 살아가는 구보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는 RSS 리더기를 돌려 외국 세이버메트리션들의 블로그에서도 잠시 머문다. Aaron은 다이어트에 성공해 가고 있고, Dan은 여전히 굳이 필요한 것 같지 않은 메트릭을 연신 만들어 낸다. David은 숫자에 함몰돼 가는 것 같으며, Tango는 위대하다. 아직도 회복중인 Peter의 ESPN 블로그에는 여전히 글이 올라오지 않는다. Rob은 특유의 스타일로 여전히 독자로서의 재미에 충실할 수 있게 해주고, John는 숫자만 봐서는 안 되며 자신도 수 없이 많은 경기를 지켜본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BaseballMusings의 D. Pinto는 사이트에 새로운 배너를 추가했다. 그에게는 블로깅이 생업이니 이해가 가는 일이다.

사실 구보 역시 한때 그렇게 먹고 살고 싶은 생각을 했다. 야구 관련 잡지 한 곳, 보통 잡지 두 곳, 그리고 인터넷 사이트 하나. 구보가 글을 주고 돈을 받는 곳들이었다. 물론 결코 큰 돈은 아니지만, 가끔 남들에게 술을 살 만큼은 됐다. 그래서 작은 오피스텔 하나를 얻어 쓰고 싶은 글이나 실컷 쓰면서, 아이들 논술 지도나 해보자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현실의 벽은 그리 간단치가 않았다. 결국 어쩔 수 없이 구보 또한 월급쟁이로 살아야만 할 팔자였던 것이다.

TEPS 정기 시험 안내 문자 메시지가 도착하자 구보의 이런 생각은 더욱 간절해진다. 평소 같았으면 바로 삭제 버튼을 눌렀을 문자 메시지를 일부러 전화기에 그대로 남겨둔다. 당장은 아니겠지만, 아마 접수 마감일이 다가오면 구보는 부모님의 신용카드 번호를 눌러 응시료를 지불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는 시험 당일날 새벽까지도 블랙아웃으로 막아 놓은 경기를 보기 위해, 프록시 서버를 찾아 여기저기를 헤매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 시험 시간이 임박해서야 겨우 고사장에 들어가고, 야구 스코어에 마음 졸이며 대충 시험지를 훑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구보에게는 다른 생활이 필연적으로 필요하지만, 어쩔 수 없이 야구가 중심에 놓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게 구보니까 별 수 없는 일이다.

게으름 피우지 말고, 결재부터 우선 해두자는 생각이 들어 구보는 마루에 나와 어머니를 부른다. 하지만 이미 방에만 갇혀 있는 아들을 피해 어머니는 외출한 상태다. 티비를 켜자 봉황기 고교야구가 방송되고 있었다. 선린상고와 경북고간에 벌어진 25년만의 리턴매치였다.

25년 전의 주인공이었던 박노준, 김건우는 이미 그라운드를 떠나 마이크 앞에 앉아 있다. 사실 해설자로서 그들에게 점수를 준다면, 고교시절 그들의 야구 성적보다는 시험 성적에 더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갓난 아이 시절에도 티비에서 야구 중계와 광고만 봤다는 구보라고 치자면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야구 선수들은 구보에게 아저씨이거나 형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구보 또래거나 그보다 어린 선수들도 심심찮게 발견된다. 그러니까 나이를 먹어간다는 건 바로 그런 일이고, 이 정도 나이라면 확실히 자신의 생활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건 굳이 행복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다만, 매일의 시간을 불포화 상태로 방치하지만 않으면 될 것 같다.

요즘 구보는 지나친 공허함에 시달린다. 그건 바로 그가 시간을 너무 방치해두고 있기에 생긴 일이다. 아니, 시간을 오직 야구로만 채우려는 헛된 망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구보는 생활에서 야구를 떼어내기로 결심한다.

사실 그건, 구보가 선수로서 마지막으로 그라운드를 밟았을 때 굳게 마음먹었던 일이기도 했다. 무릎이 부셔져 야구를 그만두면서, 구보는 생각했다. 다시는 야구 따위에 내 인생을 단 1초도 낭비하지 않겠다.

그리고 학창시절 내내 구보는 이 결심을 지키는 듯 했다. 그러나 대학에 진학한 이후 그의 응원팀이 연고지를 바로 집 코 앞으로 옮겨오자 상황은 달라졌다. 갑자기 잊고 있던 어떤 열정이 되살아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 후로 구보는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야구장을 찾게 됐다. 평일이든 주말이든 저녁에 시간을 내지 못하니 그 많던 친구들과 점점 멀어진 것도 당연한 일이다. 요즘도 구보는 모든 약속을 야구장에서 잡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그제는 모처럼 5년 전에 과외를 하던 여자 아이를 만나기로 했던 날이었다.

"너 야구장 가봤냐? 오랜만에 만나서 어색할 텐데, 야구장이나 갈까?"
"저 야구장 한번 꼭 가보고 싶었어요. 오빠, 대신 너무 더우니까 에어컨 나오는 자리에 앉아요."

도대체 이 아이에게 우리 야구장의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결국 그냥 맥주를 마시는 걸로 약속을 바꿨다. 그리고 그 아이와 맥주를 마시는 내내, 구보는 10분이 멀다하고 무선 인터넷으로 경기 결과를 확인하고 있었다. 0:2로 지고 있던 경기는, 어느새 2:2가 됐고 다시 4;2로 역전에 성공했다.

그때마다 핸드폰 요금 역시 100원씩 차근 올라가고 있을 것이다. 마치 죽기 전에 반드시 풀어내야 할 비밀이라도 된다는 듯, 구보는 그렇게 100원짜리 비밀을 그 날만해도 얼마인지 모를 만큼 많이 사버렸다.

결국 카드 결재에 실패한 구보는 일찍 야구장을 향하기로 마음먹었다. 유니폼을 챙겨 입고, 모자를 쓴 다음 캐논 스트랩을 어깨에 멨다. CF 카드가 꽂혔는지 확인하고 나서 렌즈를 장착한다. 모처럼 삼각대까지 챙겨들고 여유롭게 현관문을 나선다.

에어컨 밖의 공기를 쐬자 후끈한 기운이 느껴진다. 하지만 아무도 잘 다녀오라거나, 일찍 들어오라는 인사를 해주지 않는다. 구보는 혼자서 일찍 들어올게요, 하고 외친다. 편의점에 들러 담배 한 갑을 사서 한 대를 느긋하게 피우며 야구장을 향해 걷는다.

구보가 관중석에 들어서자 홈 팀 타자들이 배팅 연습을 하고 있었다. 맥주 한 캔을 사서 마시며 눈을 감고 조용히 타격음을 감상하는 구보 씨. 이 순간이 사실 구보에게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소리만 가지고 누가 타격을 하고 있고, 어떤 타구를 날렸는지 구보는 퀴즈를 풀 듯 머리 속으로 상상해 본다. 눈을 떠 확인해 보면 가끔 정확하게 맞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는 틀리기 일쑤다. 하지만 조용한 관중석에서 누구의 방해도 없이 홀로 야구를 만끽할 수 있는 이 순간이 구보에게는 너무나도 행복한 것이다.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 야구장 친구들로부터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한다. 이들은 모두 매일 아침 외출할 곳을 가지고 있는 녀석들이다. 대체로 표를 미리 끊어달라는 부탁이다.

매표소가 멀어서 귀찮을 법도 하건만, 사실 구보는 이 순간 역시 즐긴다. 외야를 천천히 걸으며 날아오는 타구를 다양한 각도에서 즐길 수 있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을 향해 홈런성 타구가 날아오는 그 순간의 공포심을 구보는 사랑한다.

아니, 사실 구보는 야구와 관계된 그 모든 것을 사랑한다.

숫자를 그토록 혐오하던 구보가 세이버메트리션이 될 수 있었던 건 그런 까닭이었다. 구보는 학창시절 내내 수학을 가장 싫어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말하자면 사칙연산만 할 줄 안다면, 사는 데 큰 지장이 없다고 믿었던 구보였다.

하지만 그는 이제 야구 이외의 다른 사실들도 숫자가 없이는 이해하는 데 애를 먹는 지경이 돼 버렸다. 야구를 위해 숫자와 친해지려 발버둥친 까닭이다.

덕분에 주식으로 생계를 꾸려볼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대한민국의 주식시장이라는 게 경영 지표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곳이었다. 유치한 비유를 들자면, 결국 숫자가 야구의 위대함을 온전히 반영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숫자가 없다면 야구를 이해하기는 더더욱 어려워진다. 그러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경기는 또 다시 패배로 끝이 났다. 구보는 모처럼 야구장을 찾은 선배와 함께 호프로 향했다. '간단히'로 시작했던 자리는 결국 새벽 세 시를 넘기고 있었다. 취해서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선배의 말이 이어진다.

"구보야, 뭐 네가 어디 가서 네 자리 하나 못 찾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 하지만 말야, 형은 니가 계속 야구에 대해서 쓰는 게 보고 싶어. 누구에게나 열린 한 자리가 아니라, 너만이 차지할 수 있는 그런 한 자리 말이야."

구보는 그런 자리는 애초부터 없다고 말을 하려다 그만둔다. 그러니까 선배가 구보를 좋아해주는 것과는 별도로, 구보는 이것이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 알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얼마 전에 한 야구 기자로부터 들었던 충고가 기억이 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구보는 글이 재미없어서, 안 팔려."

구보라고 해서 그걸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꼭 팔아야 될 때까지는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잘난 체 하자면, 자신이 읽고 싶은 글을 아무도 써주지 않는 까닭이었다. 그러니까 구보 역시 심할 정도의 나르시즘 환자였고, 본인 스스로가 자기 글의 가장 열렬한 애독자였던 것이다. 구보는 자기 자신에게 구역질이 났다. 그러니까 일기장에 써야 할 글밖에 쓰지 못하는 게 바로 구보였다는 뜻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야구부터 보는 구보, 대낮엔 온통 야구 기록만 뒤지고, 저녁에는 야구장에서 사람들을 만나, 새벽까지 야구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시는 구보.

하지만 어쩌면 그에게 야구는 그저 시간의 공허함을 채우는 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야구를 생활로 삼으려 해도, 그건 확실히 구보의 능력 밖이다.

집에 돌아와 조용히 현관문을 여는 데, 일찍 잠들어서 깼다며 어머니가 티비 앞에 앉아 있다. 자식이 늦게 돌아올 때까지 결국 잠자리에 들지 못하는 모정이다.

"엄마, 나 이제 야구 안 봐."
"야, 말도 좀 말 같은 걸 해라."
"치, 나 대학 갈 때도 야구 안 봤잖아. 취직할 때까진 확실히 안 봐."

자못 진지한 구보의 말에 어머니도 놀란 눈치다. 하지만 정말 구보는 자신의 생활에서 야구를 떼어내기로 굳게 결심한 상태다.

그러니까 이 나이가 되면, 확실히 자신의 욕망뿐 아니라 가족들의 욕망 또한 헤아릴 줄 알게 되어야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언제까지 베이스볼 보이로만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구보 자신이 저 진술이 거짓이 되리라는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는 야구 바보, 구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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