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이 글은 15일자 토요판 커버스토리 기사로 준비했던 내용입니다. 지난해 8월에 커버스토리를 썼을 때는 제가 쓴 글을 거의 그대로 살려주셨는데, 이번에는 데스킹을 많이 거쳤습니다. 그래서 원문 저장 차원에서 블로그에 글을 남겨둡니다.

희망은 양심이 없다.

희망은 이근안보다 더한 고문 기술자다. 그래서 언젠가는 내 마음을 알아줄 거라며 사랑을 포기하지 않은 사내는 스토커 신세가 돼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고, 뻔히 당첨되지 않을 걸 알면서도 1주일짜리 행복을 위해 로또를 산다. 세상에 '희망고문'이라는 표현이 우연처럼 존재하는 건 아니다.

인간의 불행만 담겼던 '판도라 상자' 맨 밑바닥에는 희망이 웅크리고 있었다. 희망은 사실 불행의 배다른 형제다.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진정 재앙은 다른 곳에 있다. 그 어느 곳에서도 다시 살아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희망.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계속 절망을 반복하게 하는 진정한 재앙"이라고 썼다.

이 독한 모르핀(진통제)에 우리는 너무도 취약하다. 독일 히틀러 시대 때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강제수용된 유대인들은 크리스마스 직후 사망률이 제일 높았고 한다.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사라지자 병에 대한 저항력도 사라졌던 것이다. 영국 출신 종교인 토마스 풀러가 말한 것처럼 "희망이 없었다면 우리의 심장은 이미 산산조각 났을 것"이다.

희망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도록 하려면 우리 스스로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아니, 우리 스스로 희망의 원천이 되는 수밖에 없다. 그래야 미국 작가 스티븐 킹이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에 쓴 것처럼 "희망은 좋은 것이고, 좋은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고 크게 소리칠 수 있다.

이렇게 차고 넘치는 희망 이야기에 또 하나를 더한다. 지금부터 시작할 이야기는 음지(陰地)에서 늘 양지(陽地)를 지향하는 어떤 '마이너 선수'의 희망가다. 이 이야기는 '홍유상'으로 시작해 '따뜻한 박수'로 끝난다. (소제목은 한대수 '희망가'에서 따왔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올해 프로야구 삼성에 입단한 신인 투수 홍유상(24)은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게 이상한 선수다. 2차 신인 지명회의(드래프트) 9라운드로 프로 무대에 들어온 선수를 기억하는 건 원래 쉽지 않은 일이다.

인터넷에서도 그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도 쉽지 않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서 홍유상을 검색하면 '야구선수 홍유상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블로그 글이 제일 먼저 뜬다. 그의 고종사촌 형이 쓴 글이다.

미국 메이저리그 텍사스 추신수(32)는 당연하다는 듯 네이버에서 손수 작성한 프로필이 제일 위에 뜨고, 로스앤젤레스(LA) 다저스 류현진(27)도 마찬가지다. 프로야구 선수가 직업인 많은 이들이 그렇다. 홍유상과 같은 팀에, 역시 신인에, 마찬가지로 투수인 이수민(19)조차 동명이인과 함께 프로필이 뜬다.


한국야구위원회(KBO)에 따르면 올해 프로야구 등록 선수 597명은 평균 연봉 1억638만 원을 받고, 키도 183㎝나 된다. "프로야구 선수는 1등 신랑감"이라는 한 매체 표현은 절대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이수민과 홍유상의 차이는 무엇일까. 대구 상원고 출신 이수민은 1차 지명을 받고 삼성 유니폼을 입었다. 성균관대를 졸업한 홍유상은 2차 드래프트에서도 93명이 뽑히고 나서야 프로 행을 확정할 수 있었다. 프로야구 선수는 고졸이 대졸보다 인정받는 보기 드문 직업이다. 올해 억대 연봉자 중 57.4%(78명)가 고졸이다.

두 선수도 이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홍유상과 이수민이 올해 받는 연봉은 2400만 원으로 같다. 대신 이수민은 계약금으로 2억 원을 받았다. 홍유상은 3000만 원이다.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받는 천문학적인 연봉은 굳이 거론할 필요도 없다. 홍유상은 마이너 중에서도 마이너다.

신생팀 KT 우선 지명과 각 팀 1차 지명까지 모두 합치면 홍유상은 전체 106번으로 프로야구 신인 선수가 됐다.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이런 선수 대부분은 1군 구장 전광판에 자기 이름도 새겨보지 못하고 유니폼을 벗는다.

홍유상보다 5년 앞서 프로야구 선수가 됐던 2009년 드래프트 지명자 73명 중 25명(34.2%)은 현재 '은퇴' 상태다. 프로 팀에서 지명을 받는 건 그해 고졸과 대졸 선수를 합쳐 10% 안에 드는 엘리트라고 확인시켜주는 희망이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3명 중 1명이 평생을 매달린 꿈을 포기하는 데는 5년이면 충분하다. 희망은 참 매몰차다.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신고선수(연습생) 출신 문우람(22)은 지난해 넥센에서 69경기에 나와 타율 .305, 4홈런, 28타점, 41득점을 기록하며 신데렐라 스토리를 썼다. 출장 경기는 한 시즌 프로야구 전체 경기(128경기) 절반을 조금 넘는 수준이지만, 6월 22일에 1군 엔트리에 처음 이름을 올린 뒤로는 사실상 붙박이였다. 문우람은 넥센의 희망이었다. 문우람이 없었다면 넥센이 지난해 정규리그 3위 돌풍을 일으켰을 확률은 희박하다.

문우람은 광주동성고 재학 시절 투수와 타자를 겸하면서 청소년 국가대표로 뽑힐 정도로 재능을 인정받던 '메이저'였다. 문제는 투수로서는 키(177㎝)가 작고 타자로서는 발이 느리다는 점. 2011년 신인 드래프트 때 그를 원하는 구단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학에 간다고 4년 뒤 기회가 생긴다는 보장도 없었다.

문우람은 하릴없이 연습생으로 넥센에 입단했다. 프로 첫해 퓨처스리그(2군)에서 타율 .283을 기록하며 연습생 딱지를 떼는 데 성공한 문우람은 이듬해 .330으로 타율을 끌어올렸고, 9월에는 1군 무대에도 데뷔했다. 그러나 1군에서는 71타석에서 타율 .231에 그쳤다.

지난해 시작은 또 한 번 2군이었다. 지난해 2군에서 거의 석 달을 보내고 나서야 1군에서 부름을 받았을 때 문우람은 "절대로 여기로 돌아오지 않겠다. 죽기 살기로 뛰겠다"며 전남 강진 넥센 2군 숙소에서 짐을 꾸려 나왔다. 야구팬들은 타석에 들어선 그를 보며 "눈에서 레이저가 나온다"고 했다. 그만큼 독기가 서린 눈빛이었다.

문우람은 "(2012년에) 1군 무대는 전혀 다른 걸 깨달았다. 그래서 지난해 2군에서 타격 자세를 교정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며 "고교 시절에도 가져다 맞히는 건 자신 있었지만 장타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발이 빠른 것도 아니라 투수를 포기하지 못했었다. 이제 목표가 분명한 만큼 이를 악물고 뛰겠다"고 말했다.

문우람은 지난 시즌에는 확실한 주전급이었지만 그게 올해 성공까지 보장하는 건 아니다. 반(半)시즌 정도 반짝 활약하고 사라진 타자는 얼마든 있다. 성공신화를 쓰고 있을 때는 모든 팬들 추앙을 받지만 방망이가 식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팬들은 또 다른 선수에게 눈길을 돌린다.

롯데 황동채(31·개명 전 황성용)도 2007년 7월 1군 경기장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다시는 2군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황동채는 1군 무대 첫 한 달 동안 타율 .386을 기록하며 롯데 팬들이 '물고 빠는' 선수로 자리매김하는 듯 했다. 그러나 그 뒤로 거의 7년이 지나도록 사직(롯데 1군 경기장)보다 상동(2군 숙소)이 더 익숙한 선수가 되고 말았다.

요컨대 프로야구 1군 무대에서 성공하려면 근성이나 '깡'만으로는 부족하다. 미국 영화 '19번째 남자(원제 Bull Durham)' 대사처럼 "누군가 평생을 마이너리그에서 보낼 때 다른 누군가는 1주일에 하나씩 터진 '바가지 안타' 덕에 뉴욕 양키스 유니폼을 입는다."

그래서 마이너 선수들에게 "힘내. 언젠간 기회가 올 거야"하고 말하는 건 어쩌면 무책임한 일이다. 그들이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는 까닭이다. 그저 "힘들지?"하고 어깨를 두드려 주는 게 그들처럼 마이너로 살아가는 우리 대부분이 갖출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인지도 모르겠다. 희망은 정말 가혹하다.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히 생각하니…

홍유상 역시 고교 2학년 때까지는 광주진흥고 김정훈(23·현 넥센)과 함께 동년배 최고 투수로 손꼽히던 '메이저'였다. 각종 전국대회 투수 기록 상위권은 늘 이 두 선수가 양분했다. 그때 허리디스크가 찾아왔다. "수술을 하기도 애매하고, 안 하기도 애매하다"는 진단에 홍유상은 재활을 결심하고 2학년을 두 번 다녔다.

'고교 4학년'이었던 2009년 봄 홍유상의 기다림은 부푼 희망으로 바뀌었다. 그해 6월 한 스포츠 매체는 "홍유상 같은 선수는 검증이 끝났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프로에서 몇 순위 지명을 받느냐의 여부"라고 평했다. 그러나 여름이 지나며 구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홍유상은 그때를 떠올리며 "옛날만큼 실력이 나오지 않아 참 답답했다. 특히 부모님께 죄송했다"고 했다.

삼성 2군 연습장 경산볼파크에서 만난 홍유상은 인터뷰 내내 '부모님'이라는 표현을 22번 썼지만 사실 그에게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다. 아버지는 그가 초등학생이 되기도 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 뒤로 어머니는 강원 강릉시에서 치킨 집을 하며 홍유상과 누나를 키웠다. 홍유상은 중학교 때 가내영 당시 인천 제물포고 감독 눈에 띄어 인천으로 스카우트 됐다. 홍유상은 휴대전화에 가내영 전 감독(43)을 '아빠'라고 저장해두고 있다.

프로에서 불러주지 않을 게 거의 확실해지자 '아빠'는 그를 데리고 학교 근처에 있는 월미도로 향했다. 남자 둘이서 바이킹도 타고 인형도 뽑고 밥도 먹으면서 신나게 놀았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홍유상의 손에는 커다란 인형도 들려 있었다. 홍유상은 "그때 감독님이 '당장 프로를 못 가더라도 야구를 그만할 것도 아닌데 너무 낙담하지 말아라. 너 정도면 달라는 대학 많다. 다시 시작하면 된다. 너무 당장 앞만 보고 가지 말라'고 말씀해주셨다”고 전했다.

부상 전력이 있는 그를 프로 팀에서 달가워할 리가 없었다. 홍유상은 성균관대에 진학했지만 3학년이 돼서야 제대로 마운드에 오를 정도로 몸이 좋지 못했다. 막상 마운드에 올랐을 때는 원하는 곳에 공을 던질 수 없는 '스티브 블래스 신드롬'이 발목을 잡았다.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너무 커 '마음의 병'에 걸린 것이다. 홍유상은 "마운드에 올랐는데 갑자기 공을 못 던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에 밸런스도 없어지고 정신력도 약해졌다. (화가 나서) 공보다 글러브를 더 많이 던졌다"고 회상했다.

프로 구단에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성균관대 4학년 때 그를 지켜본 삼성 스카우트는 이렇게 썼다. "다소 작은 신체조건에 반하는 속구 구사 능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너무 힘에 의존하는 투구형태를 가지고 있어 제구력이 불안정하고 변화구 구사능력이 떨어져 보임." 냉정하게 말해 삼성이 그를 지명한 건 현재가 아니라 고2 때 과거 모습 덕이었고, 어디까지나 '로또'를 노린 선택이었다. 그렇게 홍유상은 또 한 번 '희망'이라는 감옥에 갇혔다.


세상 만사를 잊었으면 희망이 족할까

한 사람 인생에 감히 점수를 매길 수 있다면 가내영 전 감독은 100점과는 확실히 거리가 먼 사람이다. 프로야구 선수로서 14년을 뛰면서도 34승밖에 거두지 못했고, 그나마 패(43패)가 승보다 많았다. 통산 평균자책점 4.71도 그리 인상적인 기록은 아니다. 게다가 고교 감독이던 2012년 입시비리 문제로 영어(囹圄)의 몸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홍유상은 여전히 "(가내영 감독이 구속된 것) 사람들 오해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그게 진짜 희망일지 모르겠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손가락질해도 "힘내세요, 제가 있잖아요"하는 믿음을 져버리지 않는 이가 있다는 것 말이다. '그래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희망을 꿈꿔야 한다는 뜻이다. 가내영 전 감독이 미래에 어떤 사람이 돼 있을지 오늘 현재 그 누구도 기억할 수 없다. 미래의 홍유상 역시 마찬가지다.

스포츠작가 김은식 씨는 자기 책 '돌아오지 않는 2루 주자'에 이렇게 썼다. "때로 사람들은 야구 선수 또한 사람이라는 것을 잊는다. 그래서 세상 사람 모두가 알 만한 업적을 남기지 못하면 '선수도 아니라는' 철없는 생각도 가끔 한다. 그들 중 누구도 세계 최고의 샐러리맨, 세계 최고의 학생이거나 세계 최고의 주부로서 번듯한 기록하나 세워놓지 못했음에도, 저마다 글로 풀자면 책 몇 권을 써도 부족한 감동과 희열과 분노를 품은 귀한 삶들이라는 사실을 가끔 잊는다."

그러니 우리 누군가를 마이너라고 함부로 재단하지 말자. 남의 희망을 비웃는 것이야 말로 희망이 인간에게 심어 놓은 가장 양심 없는 면모다. 독일 극작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누군가를 그가 잠재적으로 될 수 있는 사람으로 대하면 정말 그렇게 된다"고 했다. 그저 언제든 서로 말없이 따뜻한 박수를 쳐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세상은 살 만한 곳이 아닌가. 홈런왕 이승엽(38·삼성)조차 시작은 실패한 투수였다. 희망은 늘 실패에서 싹이 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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