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프로와 아마추어는 다릅니다. 한국전력 전광인(22·사진)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배구도 그랬습니다. 전광인은 4일 현재 경기당 평균 20득점으로 토종 선수 가운데 1위(전체 5위), 세트당 서브 에이스 0.368개로 역시 토종 선수 중 1위(전체 4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공격성공률(55.05%) 전체 6위가 초라해 보일 지경입니다. 단언컨대 프로배구 올 시즌, 아니 사상 최고 남자 신인은 전광인입니다.
 
좋든 싫든 프로배구는 외국인 선수 몰방(沒放) 배구가 기본 옵션입니다. 자연히 토종 공격수들은 '외국인 선수가 해주면 된다'면서 뒤로 물러나게 마련입니다. 공격 기회가 줄면서 해결사 본능을 잊는 것이죠. 그 탓에 대학시절 펄펄 날면서 드래프트 1순위로 뽑혔던 선수들도 프로 무대에 와서는 순한 양이 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현재 최고 토종 거포로 손꼽히는 현대캐피탈 문성민(27)도 그랬습니다. 독일에서 활약하고 2010~2011 시즌에야 국내 무대에 복귀했지만 데뷔 첫 해 성적은 17.5득점밖에 안 됐습니다. 심지어 공격만 하면 되는 라이트로 뛰었는데도 그랬죠. 다른 선수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시즌  선발팀  이름  평균 득점  공격 성공률  서브 에이스  비고
 2005  대한항공  신영수  7.0  46.59%  0.064  
 2005~2006  대한항공  강동진  13.5  42.49%  0.188  영구제명(승부조작)
 2006~2007  대한항공  김학민  8.6  44.62%  0.183  
 2007~2008  LIG손해보험  김요한  6.9  41.31%  0.156  
 2008~2009  한국전력  문성민  17.5  54.85%  0.297  2008~2010 해외 진출
 2009~2010  우리카드  강영준  13.9  49.41%  0.077  
 2010~2011  한국전력  박준범  15.8  48.17%  0.092  영구제명(승부조작)
 2011~2012  우리카드  최홍석  14.4  49.18%  0.174  
 2012~2013  LIG손해보험  이강원  3.6  48.94%  0.091  
 2013~2014  한국전력  전광인  20.0  55.08%  0.368  4일 현재

순수 신인으로 프로와 아마추어 벽을 허무는 데 제일 가까이 간 선수는 사실 전광인의 팀 선배 박준범(25)이었습니다. 하지만 박준범은 승부조작 사건에 연루돼 2011~2012 시즌이 끝난 뒤 한국배구연맹(KOVO)에서 영구제명한 상태입니다. 아버지 박형룡(52)과 함께 부자 국가대표가 되는 영광을 누렸지만 그걸로 끝이었죠. 이때 한국전력(당시 KEPCO45)에서는 박준범뿐 아니라 김상기(33) 임시형(28) 최일규(27) 등이 같은 혐의로 영구제명 당했습니다.

올 시즌을 앞두고 17년 만에 친정 팀에 돌아온 신영철 감독(49)은 "팀을 맡고 보니 남아 있는 선수들은 대부분 수련 선수(연습생)급이더라"고 아쉬워하면서도 "C급 선수가 하루 아침에 A급으로 될 수는 없다. 이런 선수들은 꾸짖기보다 잘하는 부분을 키워주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선수단에 패배주의가 만연했을 때 필요한 건 돌파구를 찾아줄 리더. 신 감독이 "쓸 만한 선수"라고 표현한 건 방신봉(38) 하경민(31) 같은 베테랑 선수들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경기 후반 발이 무거워지게 마련이었죠. 그래서 신 감독은 대신 젊은 전광인을 리더로 키우기로 작정했습니다.

지난달 30일 LIG손해보험 경기에서 신 감독은 전광인에게 "너 혼자 배구해? 어디서 그런 배구를 배웠냐"며 꾸짖었습니다. 이미 2-0으로 앞선 경기를 두 번 연속 2-3으로 역전패한 데다 이날 4연패 위기에 몰리자 나온 장면. 신 감독은 "앞장서서 동료들을 독려하고 각자가 가진 힘 이상을 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줘야 하는 선수가 (전)광인이다. 그런데 그 날은 팀을 믿지 못하고 자꾸 혼자서만 해결하려 했다"며 "다음 날 어깨 주물러 주면서 다 풀었다"고 말했습니다.


전광인도 이를 모를 리 없습니다. 전광인은 3일 경기에서 대한항공에 3-0으로 승리를 거둔 뒤 "경기 끝나고 감독님 말씀을 되짚어 보니 정말 가슴에 와닿았다. 사실 이렇게 지는 경기만 하는 게 배구 시작하고 처음이라 많이 힘들었는데 더 힘을 내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전광인은 이 경기에서 공격 성공률 65.22%를 기록하며 팀 공격을 이끌었습니다. 그 덕에 한국전력은 프로 출범 후 처음으로 대한항공을 3-0으로 완파하는 역사를 썼습니다.


박준범이 프로와 아마추어 벽을 거의 깨뜨리려고 했을 때 한국전력의 외국인 선수는 밀로스(27·몬테네그로)였습니다. 올해도 밀로스는 한국전력에서 뜁니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밀로스가 '특급' 선수는 못 되죠. 하지만 거꾸로 그래서 전광인에게 '해결서 본능'을 키울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전광인은 "무엇보다 한 라운드 전승을 해보는 게 목표다. 6연승을 해 보면 우리 팀이 강하다는 걸 증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느 덧 리더의 풍모를 느낄 수 있는 발언입니다. 꼴지의 반란을 언제든 기다리는 저로서도 꼭 보고 싶은 장면이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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