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야구는 기록의 경기고, 단체 경기입니다. 선수 개개인 성적을 모으면 팀 기록이 됩니다. 팀 타자들이 친 홈런을 다 합치면 팀 홈런 기록이 되고, 안타나 도루 실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자책은 다릅니다. 선수 개개인 자책을 다 모으면 팀 자책보다 많을 때가 있습니다.

개인 자책 합계 팀 자책
삼성 508 507
LG 469 469
넥센 525 525
두산 585 584
롯데 503 502
SK 529 527
NC 503 503
KIA 651 650
한화 668 666
실제로 올해 프로야구 9개 팀 가운데 선수 자책 합계하고 팀 자책이 같은 팀은 넥센 LG NC 등 3팀뿐입니다. 나머지 6개 팀은 팀 자책이 개인 자책 합계보다 적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 걸까요? 그건 '반(半)자책'이라는 개념 때문입니다. 야구에서 실점이 자책과 비자책으로 나뉜다는 건 상식. 보통 실점 과정에 야수 실책이 끼어 있으면 비차잭이 됩니다. 투수에게 책임이 없는 점수라는 뜻이죠.

반자책은 투수한테는 책임이 있지만 팀 투수진에는 책임이 없는 실점입니다. 그래서 반자책은 선수 개인에게는 자책이지만 팀 투수 기록에서는 자책이 아닙니다.

반자책은 실책이 나온 이닝에서 투수를 바꿨을 때 기록합니다. 야구규칙 10.18(메이저리그 규칙은 10.16)(i)는 "이닝 도중에 투수가 교체될 경우 자책점을 결정할 때 구원투수는 출전하기 전까지의 실책 또는 패스트볼에 의한 아웃 기회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고 돼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항의 목적은 구원투수가 자책점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무책임하게 투구하는 것을 막으려는 데에 있다"고 부기를 달아뒀습니다.

그러니까 투수가 바뀌면 비자책 기준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이닝을 재구성하는 겁니다. 만약 이 규정이 없다면 실책이 나온 이닝에서 등판한 구원 투수는 100점을 줘도 자책은 0일 겁니다. 이런 일을 막으려고 이 조항이 있는 거죠.

예를 들어 투수 A가 마운드에 있는 상태에서 실책 3개로 만루가 됐다고 칩시다. 감독은 A를 내리고 투수 B를 올렸습니다. 여기서 투수 B가 만루 홈런을 맞습니다. 그러면 A 기록에는 3실점(야구에서는 주자가 득점하면 그 주자를 내보낸 투수 책임입니다.)이 올라가지만 모두 비자책입니다. 실책 3개가 아웃이었으면 그 이닝이 끝났을 테니까요. 투수 B는 타자 주자가 올린 1점이 자기 자책으로 남게 됩니다.

이때 팀은 어떨까요? 팀 실점은 4점이지만 자책은 없습니다. 팀으로서도 이닝이 끝났어야 할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거니까요. 이때 투수 B가 기록한 자책점 1점이 바로 반자책이 됩니다. 선수에게는 책임이 있지만 팀으로서는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실제로는 좀더 복잡합니다. 한번 반자책이 나온 사례를 보겠습니다. 올해 5월 12일 목동 경기에서 6회말 나온 장면입니다.


기록지에서 ●은 자책을 ○은 비자책을 뜻합니다. 반자책은 ◑. 기록지가 낯선 분이 적지 않을실 테니 문자 중계 형태로 바꿔보면:
 
─── 넥센 6회말 공격 시작 ─────────────
• 4번 타자 박병호: 유격수 땅볼
• 5번 타자 강정호: 2루수 실책 → 2루까지 진루
• 6번 타자 유한준: 우중간 2루타 → 강정호 득점(비자책)
─── SK 투수 교체: 김광현 → 백인식 ────────
• 7번 타자 김민성: 폭투로 유한준 3루 진루 → 우전 안타 → 유한준 득점(자책점)
─── SK 투수 교체: 백인식 → 진해수 ────────
• 8번 타자 신현철: 대타 서건창 → 좌중간 안타 → 김민성 3루 진루 → 서건창 2루 진루
• 9번 타자 박동원: 대타 이택근 → 고의사구 → 주자 만루
• 1번 타자 장기영: 2루수 실책 → 김민성 서건창 홈인(이상 반자책) → 이택근 2루 진루
─── SK 투수 교체: 진해수 → 이재영 ────────
• 2번 타자 김민우: 대타 이성열, 2루 대주자 정수성 → 이성열 우전 안타 → 정수성 홈인(비자책) → 장기영 3루 진루
• 3번 타자 오윤: 1루 대주자 서동욱 → 오윤 희생플라이 → 장기영 홈인(비자책)
• 4번 타자 박병호: 3루수 땅볼
─── 넥센 6회말 공격 끝 ──────────────

조금 복잡할 수 있으니 차근 잘 따라오셔야 합니다. 처음부터 보시면 강정호는 실책으로 1루를 밟은 주자입니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런 주자가 득점에 성공할 때는 보통 비자책입니다. 그 다음 유한준은 2루타로 출루한 뒤 득점했으니 자책. 책임 투수는 유한준을 내보낸 김광현입니다.

여기서 김광현에 이어 등판했던 백인식이 물러나고 진해수가 1사 1루에서 올라옵니다. 1루에 있는 김민성은 누구 책임? 당연히 백인식 책임입니다. 여기서 진해수는 다시 서건창에게 안타를 내주며 김민성이 3루에 가고, 공이 3루로 향하는 사이 서건창은 2루까지 내달립니다.

여기서 이만수 SK 감독의 선택은 만루 작전. 만루에서는 어떤 베이스에 공을 던져도 태그 없이 아웃이기 때문에 (이런 상황을 포스 아웃 상태라고 합니다.) 병살을 노리려고 만루 작전을 펴는 겁니다. 진해수는 이택근을 고의사구로 거릅니다.

다음 타자 장기영이 공을 때릴 때만해도 이 작전이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타구가 전진 수비를 하고 있던 SK 2루수 정근우의 글러브 속으로 빨려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근우가 유격수 김성현에게 공을 던져 병살을 처리하려고 하던 순간 공이 빠집니다. 그리고도 몇 m 옆으로 굴러갔습니다. 정근우로서는 이 이닝에만 두 번째 실책.

 
병살에 성공했더라면 당연히 이닝이 끝날 수 있던 상황. 그래서 팀으로서 이 상황은 비자책입니다. 그러나 투수 개인인 백인식과 진해수에게는 다릅니다. 이들은 각각 김민성과 서건창에게 안타를 맞고 출루를 허용했지만 이닝을 끝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니 이 점수는 자책입니다. 김민성은 백인식, 서건창은 진해수의 자책을 각각 1점씩 올리는 것.

넥센 공격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대타 이성열이 다시 2루에 있던 대주자 정수성을 홈으로 불러들입니다. 원래 정수성 자리에 있던 이택근을 내보낸 건? 진해수입니다. 그럼 이택근에게 내준 실점은 진해수 몫이 됩니다. 그런데 이미 이닝이 끝나야 할 상황이 지났습니다. 따라서 이 점수는 비자책이 됩니다. 장기영에게 내준 점수 역시 마찬가지죠.

만약 여기서 서동욱마저 홈플레이트를 밟았다면?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이재영은 자책이 올라가겠지만 팀 자책에는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팀으로서는 이미 끝나야 할 이닝이지만 부기처럼 구원 투수에게 책임을 묻는 겁니다.

올 시즌 576경기 중 이렇게 반자책이 나온 건 6경기밖에 되지 않습니다. 1%를 겨우 넘는 확률로 나오는 일인데도 야구 규칙이 이런 상황을 어떻게 처리하면 되는지 알려주고 있다는 것. 신기하지 않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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